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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 베스트 오브 유스리뷰와 비평 사이/다시 보고 싶은 영화 2022. 7. 10. 13:43
+ 한줄평 :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안서
이탈리아 제목으로 LA MEGLIO GIOVENTU(젋음의 꽃)입니다.
사실 필자는 예전에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마테오가 계속 신경이 쓰였습니다. 불쌍하다고나 할까?
저의 유사한 경험들과 내 안에 쌓인 부정적인 무의식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던 터라 공감했거니와 이로 인해 위안을 얻은 거였죠.
그래서 리뷰는 <마테오>는 왜? 죽었나, 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안스러운데,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했으니까요.
분명, 개인적으로 다시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약간의 여유로 리뷰를 쓰게되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시놉은 이탈리아 위키에서 찾을 수 있지만 감독이나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기 어려워 영화적 상징을 분석하는 동안 오류가 많을 수 있어 걱정은 됩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 주시구요. 한 번 보시고 이해가 안 되는 분들만 이 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리뷰 들어 갑니다.
<마테오 >는 자상한 부모에 반항아처럼 까칠합니다. 민감하기도 부정적이기도 한 모습이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이 드는 불안함이 엄습해오고 이 부분이 낯설어 영화를 보게 됩니다. 초기 5분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괜찮은 설정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족들의 소개가 끝나면 대학에 다니는 마테오와 니콜라의 구술시험 장면이 이어지고 마테오의 구술시험에 교수는 책을 보고 의견을 말해보라 합니다.
마테오는 "세누치오 델 베네"의 시를 단번에 알아봅니다. 누구의 시인지 번역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알 수가 없어서 안타깝더군요.

마테오는 돌려 말하지 못합니다. - "공허하니까요. 세누치오 델 베네도 공허하긴 마찬가지죠."
마테오는 교수와 말다툼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어이없게도 부모가 자랑한 수제가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설정이죠. 이상한, 아주 이상해서 그를 노려보게 만듭니다.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마테오라는 인물 설정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니콜라는 구술시험의 거의 30점-만점-에 가까운 공감점수를 받고요.
교수는 냉정하게 자신의 나라를 깍아내립니다.
가능하면 미국으로 가. 이탈리아는 부숴버여야 해, 아름답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곳이지, 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했던 이탈리아의 역사를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냉소적인 엘리트의 말은 시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영화는 적당한 타협은 없으니 골라서 잘 보라는 엄포라고나 할까.
영화는 이래야 해야 볼만하긴 하죠.
<조지아>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중에 창고에서 노숙을 하게 하는데, 니콜라가 모포를 덮어주던 장면에서 조지아는
"옷은 안벗을래"라고 말합니다.

둘은 조지아를 바라 보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성희롱 당했다는 걸 눈치챕니다. 니콜라가 말합니다.
"나도 안 벗을거야."
마테오는 아버지 집에서 진짜 침대에서 잘 거라 위로하지만, 조지아가 대답합니다.
난 아버지가 없어.
조지아가 앞으로 겪어 왔던 과거도 만만치 않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라 넘어갈 수가 없죠.
마테오는 잠이 오지 않고, 비 소리가 들리는 문가로 나가 바깥을 바라봅니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조지아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흉칙하게 번뜩이는 눈을 가진 나무와 "Caro Mateo""-친애하는 마테오-가 보인다. 마테오에게 쓰던 편지의 내용은 애써 감추려는 듯 팬으로 두 번 세 번 덧그려져 글씨를 감추고 있었죠.

흉칙하게 번뜩이는 눈을 가진 나무와 "Caro Mateo""-친애하는 마테오-가 보인다. 마테오에게 쓰던 편지의 내용은 애써 감추려는 듯 팬으로 두 번 세 번 덧그려져 글씨를 감추고 있었죠.
일기에는 흉측하게 자신을 감시하는, 또는 옭아맨 나무가 있고 그것과 대비해 마테오에게 쓰던 글은 지워진 조지아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게 되죠.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과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마저 불안한 여린 마음이 아닐까? 요.
두 번째에서나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라 영화의 작가나 감독의 세세한 의도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조지아의 상황에 가슴이 아픈 건 당연하구요.
이 부분입니다. 조지아는 일종의 메타포라는 확신이 드는 장면이죠.
이탈리아라는 사랑스러운 조지아가 죽을병도 들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고통을 받고있는 사회적 상징이라는 장면입니다.
마테오는 알고 있습니다. 조지아를 살려야만 자신도 생존을 담보 받을 수 있으리라는 걸…. 왜냐하면 자신 또한 상처받은 이탈리아이기 때문이죠.
빗소리에 깨어난 조지아는 자신의 일기장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마테오에게 도둑놈이라 불같이 화를 냅니다. 조지아는 화내는 것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죠.
마테오는 조지아가 옷을 다 갈아입는 동안에도 망연자실 서서 밖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조지아와 자신이 겪는 상처는 어쩌면 같은 곳에서 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먹먹한 고통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지 않나, 싶었습니다.
조지아의 아버지를 찾아왔지만 아버지는 조지가 배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존재를 부정당한 조지아의 부모를 만난거죠.
조지아의 존재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정채성은 누가 물려주는 건가요?
비열합니다.
과거와 유리된 조지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병든 조지아, 즉 부조리한 이탈리아의 상황을 개인을 통해 보여주는 거죠.

아버지가 없다는 말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조지아의 상처는 봉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키운 꼴이죠. 조지아를 지켜보던 마테오의 분노는 당연하지만 조지아에 대해 이제야 조금 이해할 뿐이죠. 그래서 고통 또한 지식입니다. 공감은 할 수 있지만 놓인 상황은 모든 인간이 다 다르기에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없고, 타인의 삶에 뛰어 들어야만 진심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겠죠.
두 명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는 이제야 세상을 만난 셈이죠.
코레아가 1:0 으로 이기는 장면이 나오고 카페의 주인이 머리를 감싸고 TV 주위에 모인 손님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옵니다. 오히려 "코레아 "를 연발하며 웃던 니콜라와 마테오를 보며 조지아가 웃습니다.

1966 년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겼던 충격적인 축구사를 드라마에 녹여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틀림없이 통쾌한 장면이죠. 2002년 이전엔 북한이 원조였구나! 조지아도 웃을 수 있구나. 어쩌면 조지아는 금방 치유가 되겠구나, 싶은 장면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다시 조지아를 데리고 돌아아던 중 니콜라가 조지아 문제를 물어보러 누나에게 혼자 나가고, 마테오와 조지아만 남습니다. 마테오에게 말을 하지 않던 조지아에게 마테오는 수화라도 하라고 하죠. 정말로 조지아는 말은 하지 않고 수화를 합니다. 그걸 마테오는 알아듣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려면 수화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말은 싫고 수화는 할 수 있는 낯선 장면에 감독의 의도를 묻고 싶어지더군요.
하... 감탄이 나옵니다. 부조리함을 또다른 소통으로 절묘하게 연결 시키는 장면에 대한 존경심이 들더군요.
카페에 들어가 조지아는 음료수를 고르라는 마테오를 뒤로하고 주크박스에 관심이 있습니다 . "아키 파우스토 레알리의 '아키 '"를 틀어달라 마테오에 수화로 말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니콜라에게 마테오가 아키를 틀어달라고 했다는 말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아 ~아 ~키 ~"
조지아가 마테오를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마테오는 당황하면서도 둘은 눈을 계속 마주치죠. 마테오를 노려보며 너의 모든 걸 안다는 듯, 눈빛이 달아오릅니다. 서로 눈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 걸가요?
분명 사랑한다는 감정이지만 두 사람의 부조리한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겠죠. 안 되야만 하구요.
그래서 둘은 이걸 지켜보는 모든 마테오, 모든 관람객들을 노려보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너희들은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감정을 알아?’.
애써 돌봐주는 이유는 누굴 위한 건가? 너인가 나인가.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기는 한 건가.
아니면 헤어지기 위해 만난 걸까.
두 남녀가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면 연인이 되었다는 걸 상징하겠지만, 작가의 노림수는 그게 아니었으리라.
연인을 부르는 듯 애절한 곡, 둘의 눈빛은 영화가 끝나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다시만난 니콜라와 마테오가 앉아있다, 니콜라가 조지아에게 자테리니 셋을 사오라 시킵니다.
그곳에서 문제가 생기죠. 카운터에서 거스름돈을 챙기지 않던 조지아는 뒤따라온 경찰에 연행하듯 끌려가고, 그걸 바라보던 두 형제에게 조지아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상황의 개연성은 이해되지 않지만, 나중에야 이해됩니다.
권위주의 시대라는 상황이고 마테오가 군대라는 조직으로 떠나는 계기가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경찰에 끌려가는 조지아를 쫓아 자신이 부정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권력으로 나아가는 아이러니죠.
니콜라는 그를 비난하고 부탁하고 매달리지만 단호한 마테오는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이해되지만, 이탈리아의 부조리함을 한 몸에 받아내는 이는 니콜라이고, 마테오를 완정한 모순덩어리로 설정한거죠.
불편한 상황에 자신을 희생하는 조지아, 단호한 눈 빛과 하지말라던 고개짓! 불길한 이 상황은 뭐지? 왜 마테오를 걱정하는거지?

니콜라의 호기로운 선택이 불러올 파장을 알긴 한 건가. 니콜라가 미워집니다.
여기에서 두 형제는 갈라서죠.
마테오는 기차역에서 자신의 여행은 끝났다며 불현듯 짐을 챙겨 로마로 향해 군에 입대하게 합니다.
조지아를 지키지 못한 마테오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고 해야겠죠. 그 부조리함은 입대라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기점이 되고 말았으니, 이 불편한 감정은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됩니다.
조지아는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뿐인데,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동안 진짜 정신병자가 되었듯이 사회는 부조리한 자신들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고, 결국 마테오는 사회와 가족에 대한 반감만 점점 키웠습니다.
그렇게 마테오의 사회에 대한 믿음은 상자 안에 감금되고 극단적인 선택이 그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연결됩니다.
자기혐오, 그래서 자신의 세계는 신뢰할 수 없고 눈앞의 선택은 항상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후반부에 극적인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당연한 일이 여기에서 비롯된 건데 몇 년 전엔 그냥 지나쳐 갔던지 싶습니다.
동생 니콜라는 노르웨이로 떠나 히피족을 만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노르웨이 여행을 마테오에게 권했었다.
두 형제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별이고 이탈리아의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기위한 꼭 해야만 하는 장치인 듯 싶습니다.
둘이 재회하는 곳은 피렌체라는 도시에 큰 홍수가 났을 때입니다. 군인과 꿈많은 대학생이 엇갈려버린 선택 속에서 또 잠깐 마주한 것처럼 불안합니다.
불안한 지점은 물에 잠긴 오래된 수장고의 한 장의 라틴어 필사본을 해석하며 나타납니다. 서로의 라틴어 지식을 뽐내며 읽어 가던 중, 마테오의 상급자가 일을 하지 않는다며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니콜라는 무지한 사람이라 비웃으며 평생 저들과 살거냐며 형에게 돌아오라 다그치죠.
마테오는 그는 좋은 사람인데 우리가 게으른 게 맞다고 말하고 다시 움직입니다. 둘 사이의 선택과 경험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두 번 보고 나서 알게 된 거지만 지하실에서 마테오는 자신은 경력을 쌓아 경찰이 될 거라고 한다. 니콜라는 혐오하는 눈빛으로 미쳤냐고 묻습니다. 마테오는 나중에 경찰이 될 거라는 복선인 셈이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걸 믿었냐며 농담으로 넘깁니다. 그 시대에는 경찰, 공권력은 그렇게도 혐오할 대상이었던 모양이죠.
그런 사회에서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 자체가 사실은 괴로운 일이고 눈앞의 삶만을 바라보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슬프게도.
우리사회의 민주화 과정도 그러했으니 충분히 이해할만한 장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대부분은 죽거나 훨씬 더 지독한 변절자가 되기 마련이니까.
이 시점에 두 형제는 이제 확실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관람객은 눈치 채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많이 안타깝지만 현실은 냉정하죠.
빵을 나눠주는 노인을 보며 니콜라의 친구가 체홉의 "벗꽃동산 "의 필스 (나이든 집사)와 비유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쇠락해가는 가문을 지켜보던 그의 마지막 장면의 대사 - "이제 아무것도 없다 ."-는 말이 작가가 복선으로 만든 장치로 연상되죠.
<갈등>은 예견되어 있었다. 마테오가 시위진압 중에 동료는 불구가 되고, 그런 형을 폭행한 시위대 입장에서 니콜라는 마주한다.

다시 보니 언쟁하다 돌아선 마테오의 등 뒤로 니콜라가 설득하는 장면은 참 좋다. 마주할 순 없지만 곁에 있고 싶은 마테오의 심정을 잘 드러나게 하는 장면이까.
우리들의 역사에도 있던 일이지 싶다. 전경과 대학동기, 경찰인 아버지와 시위대는 우리의 과거에도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가 개인의 관계에 피눈물 나는 갈등의 고리를 만들어내죠. 마주하는 당사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주저앉아 통곡하게 되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깨닫고 눈물만 나올 수밖에... 그리고 그 갈등의 골은 전혀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회는 그들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현재를 선택한 인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죠, 시간이 상처를 덮어줄동안 오래도록 고통스럽겠지만.
한발 더 들어가면 신영복 선택의 "담론 "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담론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가? 부조리한 사회에 동조하게 만든 의견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배적 담론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앞선 세대가 흘린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피가 현재를 올바른 선택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끌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영화는 그러한 이를 기리기위한 기록이지 않나? 싶습니다.
<마리노> 저들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서약합니까?" 그러면 ...

전기마사지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그 만행에 대해 판사를 만나러 간다. 니콜라가 자리한 곳에서 화가 난 피의자들이 있고, 그곳에 조지아는 보이지 않습니다.

동상의 뒤에서는 "붉은 여단 "의 유인물이 나옵니다. 노인의 왼손에 들린 인쇄물에 "BRIGATE ROSSE"가 선명하게 보인다.
* 붉은 여단(BRIGATE ROSSE) : 이탈리아 극좌 준군사조직으로 1970년 무장투쟁으로 이른바 혁명적 군면을 조장하고 이탈리아를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시키기위해 결성, 사보타주 납치, 은행 강도 등의 복력 행사로 유명.

마테오의 재판은 피의자의 승리로 돌아가고 모든 책임은 전기 의사의 몫이 되지만 중요한 건, 붉은 여단이란 유인물은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재판을 통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마테오와 혁명을 원하는 와이프와의 중요한 복선이기 때문이죠.
<시칠리>로 마테오가 전근한다.
그의 상관이 묻는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 묻지만 자신은 명령에 "싫다." 고 하지 않는다 합니다.
자신이 찾는 건 규칙이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겠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마테오는 사회적 규칙을 찾을 수 없어 규칙이 있는 곳으로 왔다는 말이고, 이탈리아 사회는 규칙 또는 원칙이 없는 사회라는 비아냥이죠. 마테오에 숨겨진 의도를 상관은 모를 일이지만 마테오가 대학을 버린 중요한 의미를 관객에게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가 쓰던 글은 아무런 힘이 없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의미했죠. 그래서 마테오는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도 찾을 수도 없었던 거죠.
<미렐라>는 마테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테오의 취미와 맞닿아 금방 친해지지만 마테오는 미렐라에게 자신을 동생 “니콜라”라는 이름을 알려준다. 왜 그랬을까? 부조리한 자신을 대신에 완전한 자신의 동생의 이름을 알려줘야 했을까?
자신은 부조리함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내내 부정해야만 하니까.

마테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중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이다. 마테오는 쉽게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단지 규칙 안에서 연기만 할 뿐, 사랑하는 것도 두렵다. 마테오에 자꾸 동정이 가는 지점은 이 때문이다.
미치게 불쌍한데, 내 자신또한 겪었던 자기혐오의 감정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고, 참, 많이도 울었다. 마테오와는 차원은 다른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이었지만,....
<니콜라>는 조지아를 찾아낸다.

그의 형에게 소식을 전하고 형은 가던 중에 그의 동료에게 먼저 들린다.
그는 불구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고 자신의 어머니가 매주 다녀갔다는 말을 듣는다.
어머지가 가져다준 시집도 읽는다는 걸 그때야 알게 된다.
에토레, 눈물을 흘리며 그대를 기리게 될 것이다 .
그대의 거룩한 피가 뿌려진 조국에 그들이 눈물을 뿌리리라 ...
<마테오>는 그 시를 알고있다. 다음 구절을 대신 말한다.
인간의 불행에 햇빛이 빛날 때까지.

마테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세계를 또 만난다. 불구로 알았던 동료를 위문왔지만 정작 자신이 잊고 지내던 언어의 세계에 그는 살고 있었다.
영원한 이상인 부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 사이에서 마테오는 혼란스럽다.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은 올바른가? 하는 의문들이 생겨야만 한다.
이는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 상태를 의미한다. 개인은 사회적 규율을 찾을 수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그 모든 책임은 사회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마테오의 표정에서 드러낸다. 휠체어에 앉아야 할 환자는 동료가 아닌 자신이라는 아이러니이다.
영화는 이런 풍자의 코드를 지속적으로 차용한다. 웃어야 하지만 웃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이다.
<마테오>는 조지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나서려다 의자를 조지아 등 뒤에 놓고 앉는다.

"어떻게 하면 네 머리에 닿을 수 있을까?"
...
조지아가 말한다.
"미친 마테오."
좋은 작가의 작품이 확실하다.
규칙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마테오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그는 과거를 부정하고 사회도 부정하고 사람도 부정하고선 미친 조지아 '자신'을 찾아 왔는데, 왜 미친놈이 아닐까.
자신이란 미칠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리라.
<미렐라>를 우연히 도서관에서 다시 만난다. 정확하게는 니콜라라 칭한 마테오를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을때 로마의 "빌라 첼리 몬타나"를 소개했었다. 미렐라는 진심으로 그를 좇아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테오는 책을 빌리며 자신의 신분증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거짓이 무너진 순간이 찾아온다. 미렐는 마테오 때문에 사서가 되었고 그런 일에 속 좁게 대하는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한 시점이다.
그래서 미렐라가 권하던 사과를 거부하고선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미렐라는 웃으며 사과를 마테오에게 건넨다.

마테오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는 장면이었다. 결말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때 필자는 그가 미렐라 곁에 영원히 머물길 빌었다.
미렐라의 뒷모습을 보며 마테오는 괴롭다. 자신을 알려줄 수 없는데, 미렐라는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길거리의 여자를 만났을 때에는 본명을 알려주었다. 가짜인 관계에서는 부조리한 자신의 존재는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는 미렐라에게 거짓말 한다. 자신은 경찰이 아니라 엔지니어라 소개한다.
그리고 거리의 여자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미렐라가 발견하고 물어본다. 여자 친구거냐고, 물어보는 미렐라에게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채워준다.
아이러니다.
그는 거리의 여자하고만 상대할 수 있다. 그래서 목걸이라는 장치를 통해 미렐라와 사랑을 나눌수 있게 되었다.
슬프고 불쌍한 마테오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마테오>는 미렐라를 부담스러워하고 미렐라와 약속한 시간은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만날수 없다. 그는 누구와도 진심을 다해 만날 수 없는 모순덩어리 이탈리아니까!
정말 잔인한 영화라는 생각이든다. 철저하고 표독스럽게 마테오를 몰아부친다.
미렐라와의 통화도 한 순간으로 엇갈려야만 하는,
새해를 맞아서는 안 되는 마테오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는 부조리한 이탈이아의 한 조각이라 땅속에 묻혀야 하니까.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테오는 새해를 카운트 다운하는 동안 죽음을 선택해야했다.
<어머니>는 마테오의 책을 보고 몇 권이라고 가져가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주섬주섬 마테오의 책을 챙겨서 나선다. 마당에서는 마테오의 흘린 피를 씻겨내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의 손에서 힘없이 책이 빠져나간다. 마테오의 지식은 아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듯, 과거는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는 듯. 핏물이 씻기는 소리는 무심해서, 마테오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다.
어머니는 화가나 참을 수 없다. 아들을 보내야만 하는 무기력함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결국 어머니의 분노는 마테오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를 향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다.
<니콜로>가 이탈리아식 사랑과 의무에 대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사족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죽음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한다."
난 공감한다.
이후의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도 정말 마음에 든다.
미렐라가 사랑한 마테오! 그의 유산은 사랑하는 아이가 희망으로 남겨졌다.
줄리아와 사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줄리아를 버릴 수 없어서 감옥에라도 가둬야 하는 니콜라의 강인함. 그 모든 일을 견뎌낸 니콜라도 죽은 자 이상으로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감독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 그걸 뛰어넘는 애정이 느껴집니다. 다시보니 엄청난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결말까지 꼭 다시한번 보기를 권합니다. 비극의 현대사를 넘어 세대를 이어주는 이야기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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